2021~아카이브

아이돌로지 BAD LOVE 앨범 리뷰

91LINE 2021. 10. 17.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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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hly : 2021년 9월 – 앨범 | Idology

2021년 8월 아이돌팝 발매작 중 정규앨범을 중심으로 주목할 만한 앨범을 다룬다. 에이스, NCT 127, 양요섭, 있지, 도한세, 키, AB6IX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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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 전작이며 솔로 데뷔작이었던 "Face"가 "'아티스트 키' 혹은 '인간 김기범'"의 아이덴티티를 오롯이 드러내고 조형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번 EP는 (프로모션 당시의 여러 인터뷰에서도 공공연히 언급했듯) 그의 오랜 욕구를 드러내며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미래지향적이며 '커팅-에지(cutting-edge)'한, 아티스트 본연의 매력을 극대화하기에 알맞은 사운드와 콘셉트를 능수능란하게 밀어붙이는 솜씨에는 '역시'라는 탄복이 절로 터져 나온다. 스타일링 등에서 언뜻 비치는 젠더 교란적 이미지, 가사 및 콘셉트 등에서 드문드문 포착되는 SF 레퍼런스, 레트로한 무드로 이루어진 트랙 구성 등에서 그가 꾸준히 '워너비'로 호명해온 데이비드 보위가 연상되기도. "Face"의 수록곡 'Imagine'의 연장선상에 놓인 듯 날카롭게 몰아치는 'Helium'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이 EP의 백미.

스큅: "우린 정상이길 거부한 사람들이니까." 앨범 발매 하루 전 진행된 온라인 콘서트에서 그가 스쳐 지나가듯 남긴 말이 귀에 박혔다. 케이팝 씬(scene) 내 샤이니라는 그룹의 이질성도 있지만, 그중 유독 키는 언제나 (그것이 어떠한 것이건) 소위 "정상"이라 일컬어지는 통념과 규준에서 한 발짝 비껴서 있던 사람이었다. 5년 전 JTBC 〈말하는 대로〉에서 그는 자신을 선천적인 재능으로 우아하게 헤엄치는 백조가 아닌 보컬도, 춤도, 비주얼도 타고나지 않은 닭과 같은 존재라 생각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데뷔 초 이수만 프로듀서에게 보컬과 춤, 비주얼에 대한 칭찬과 조언을 들은 다른 멤버들과 달리 "너는 이마가 넓으니 성공하겠지"라는 말을 들었다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청담동 편집숍을 발로 뛰며 패션 업계에 이름을 알리고 스스로를 브랜딩해간 그의 행보 역시 통상적인 아이돌의 커리어 발전사와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띠었다.
제대 후 '엔딩요정'의 새로운 유행을 불러왔던 샤이니 활동과 각종 예능을 통해 이목을 끈 현재, 그는 비로소 자신이 고집스레 쌓아 올린 취향의 결정판, 레트로 스페이스 위로 청중을 잡아끈다. 외계 생명체들이 노니는 그곳은 별종 소리를 들었던 그가 곧 “정상”이자 통념이자 규준이 된, 이른바 "닭 그라운드"다. 그가 오롯이 조타수로 자리한 덕인지 근래 SM 엔터테인먼트에서 나온 발매작을 통틀어 이례적인 수준의 프로덕션 합치도가 빛난다. 우선 음악적으로는 레트로 스페이스 테마에 걸맞게 신스웨이브 사운드를 주축으로 한 극적인 구성이 돋보인다. 타이틀곡 'Bad Love'는 "널 빛이며 어둠이라고 불러", "환희도 절망도 나의 것", "번지는 불길처럼 더 커져"와 같은 문어적인 표현을 비장한 가창과 구도 연출에 집중한 안무에 실어나르며 가련하고도 강렬한 멜로드라마를 폭발적으로 그려내고, 이어지는 수록곡에서도 이와 같은 연극적인 퍼포먼스가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중 하이라이트를 꼽자면 단연 'Helium'인데, '헬륨'이라는 곡의 소재에 걸맞게 정착되지 않는 화성 위를 고고하게 부유하는 멜로디와 그를 가뿐하게 수행하는 키의 애티튜드가 돋보인다.
이외에 자신만큼이나 콘셉트를 상징하는 외계 생명체들을 비춘 무드 샘플러와 티저 이미지, 문방구에 파는 장난감을 연상케 하는 독특한 앨범 패키징, 비극적인 사랑에 몸부림치는 모습과 우주선이 함락되는 장면을 교차시키는 뮤직비디오, 다수의 댄서를 동원해 입체적으로 연출된 퍼포먼스, 색색깔의 복면을 쓴 백업 댄서 스타일링, 그리고 데이비드 보위의 영향을 받은 키 본인의 스타일링에 이르기까지. 앨범을 둘러싼 모든 요소가 어느 하나 허투루 짜인 구석 없이 키의 세계를 쌓아 올리는 튼튼한 자재로 자리하고 있다. "저마다 복잡다단한 심상이 녹아있는 악곡, 가사, 안무, 뮤직비디오를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서 내놓"는 선ㅁ와 더불어, '별나다' 소리를 듣던 자신의 캐릭터를 케이팝 프로덕션을 동원해 입체적으로 연성해나가는 훌륭한 '아이돌 아티스트'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정성' 자체가 곧 고평가될 가치인 것은 아니지만, 케이팝 아이돌의 정형에서 이탈함으로써 대외적인 '진정성'을 확보하려는 구도에 갇히지 않고 케이팝의 정수를 파고들며 '진정성'을 타진해나가는 이들에 대해 분명한 인정과 존중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가 일궈낸 "닭 그라운드"는 분명 현/후세의 또다른 "닭"들에게도 좋은 영감이 되지 않을까.